프롤로그 — 지방 어느 동물병원에서 만난 황구
10년 가까히 된 것 같은데요. 지방의 한 동물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정확히 어느 도시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한데, 그날 진료실 풍경만은 정확히 기억납니다.

원장님과 이야기 나누던 오후, 한 아주머니가 황구 한 마리를 안고 들어오셨습니다.
“원장님, 얘가 요새 사료를 질질 흘리면서 먹어요. 개껌을 줘도 씹다가 내려놓고, 다시 씹다가 또 내려놓고… 입안을 아무리 봐도 피 난 데도 없고 부은 데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원장님은 잠시 잇몸을 살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여기 이빨이 좀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X-ray로 확인해봅시다.”
그때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 에스틴 다니면서 많은 동물 질환을 접해왔지만, “이빨이 녹는다”는 표현 자체가 낯설었거든요. 독자님들은 이 표현이 익숙하세요? 전 사실 이해를 못했거든요.
한참 지나 서울로 올라와 단골 원장님께 그날 사례를 여쭤봤습니다. 답은 짧았습니다.

“그거, 치아흡수병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양이한테 흔한 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강아지도 생각보다 많아요.”
그 순간 그 진료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날 그 황구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이빨 속에서 자기 몸이 자기 이빨을 조용히 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치아흡수병변, 어떤 병인가
한 문장으로 말하면 몸이 자기 이빨을 스스로 삼켜버리는 병입니다.

이빨은 살아있는 조직입니다. 만드는 세포와 부수는 세포가 균형을 이루는데, 어떤 이유로 부수는 세포(파골세포)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면 이빨을 계속 갉아먹습니다.
결국 이빨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뼈나 잇몸이 채워버립니다. 영어로는 Tooth Resorption(치아 흡수, 줄여서 TR)이라고 부릅니다.
VCA Hospitals의 강아지 치아흡수병변 공식 자료(미국 최대 동물병원 체인의 강아지 TR 표준 가이드)에서는 이 병을 “치아의 단단한 조직이 환자 자신의 세포에 의해 분해되고 흡수되는 상태”로 정의합니다. 환자 자신의 세포에 의해 — 이 표현이 이 병의 본질입니다.
2. “고양이 병 아닌가요?” — 강아지도 흔합니다

질환명 자체가 낯선 질환명이죠. 아시는 분들중 대부분은 고양이 병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실제로 검색해보시면 고양이 글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거 고양이 병 아니야?”라고 생각하기 쉽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코넬 대학교 수의대 Peralta 박사팀 연구(강아지 224마리 전 구강 X-ray 유병률 원전 논문)에서는 강아지 53.6%에서 치아흡수병변이 발견됐습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입니다. 이 논문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또한 VCA(미국 동물병원 센터)에서도 17~54%로 보고되고 있으니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닌거죠.
국내에서도 안양 이룸 동물병원 CORL 임상 소견(강아지 CORL 국내 진료 경험 정리)에서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강아지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치아가 흡수되는 문제가 관찰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고양이 병으로만 알까요? 강아지 TR은 뿌리 쪽에서 시작해 뼈로 대체되는 형태가 많아서 X-ray 없이는 안 보입니다. 반면 고양이는 잇몸선에서 시작해 육안으로도 보이죠. 그래서 강아지는 놓치기 쉽습니다.
3. 왜 발견이 늦나 — 강아지는 통증을 숨긴다
Peralta 연구의 진짜 무서운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TR이 있는 강아지의 86%가 임상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입니다
10마리 중 8~9마리는 겉으로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증상이라는 게 아프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티를 안 낸다는 뜻입니다.
미국수의치과대학(AVDC)은 이 병을 공식적으로 “본질적으로 통증을 유발하는 병변”으로 규정합니다.
마취 상태에서 TR 부위를 건드리면 의식이 없는데도 턱이 떨리는 반응이 나타날 정도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충치가 신경까지 도달한 상태와 같은 극심한 시린 통증이 이빨 안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야생 본능으로 통증을 억제하고, 만성 통증에는 서서히 적응해버립니다. 무리 사회에서 약한 개체로 보이면 서열에서 밀리거나 포식자의 표적이 되니까요. 그래서 발치 후 며칠 지나면 보호자님들이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애가 갑자기 활발해졌어요. 예전이랑 완전히 달라요.”
그동안 아팠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는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참고 있었을지도 모르거든요.
4. 보호자가 놓치는 미묘한 신호 7가지
프롤로그의 황구가 보인 신호가 바로 이겁니다.

- 사료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킴 — “원래 게걸스럽게 먹어요”로 넘기기 쉬움
- 물에 사료를 불려 먹으려 함
- 개껌·간식을 물었다가 뱉음 — 황구의 대표 신호
- 한쪽으로만 씹음
- 하품할 때 입을 끝까지 못 벌림
- 얼굴 만지면 살짝 피함
- 사료 흘림 + 침 흘림 증가
이런 행동들이 하나라도 보이면 한번쯤 의심해 보시는게 좋습니다. 8살 넘긴 아이라면 더더욱요.
5. 잇몸이 이빨을 덮는다 — 후기 육안 신호

TR은 하루아침에 진행되지 않습니다. 4단계에 걸쳐 서서히 이빨을 지워갑니다.
1단계 — 잇몸 속 뿌리부터 조용히 녹기 시작. 겉으로 완전 정상. X-ray로만 발견 가능
2단계 — 이빨 목 부위가 약해지며 잇몸에 붉은 점이나 미세한 부종. 치주염과 구분 어려움
3단계 — 이빨 머리 부분이 부러지거나 서서히 녹아 없어짐. 이빨이 부러져 보임
4단계 — 잇몸이 그 자리를 덮어버림. 겉에서 보면 이빨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매끈한 잇몸만 남음
대부분의 보호자님이 이렇게 착각하십니다.
“언제 빠졌지? 나도 모르게 빠졌나 보네.”, “노령견이라 자연스럽게 없어졌구나.” 등등
전부 오해입니다. 이빨이 빠진 게 아니라 몸이 스스로 흡수해버린 상태입니다. 그 자리를 뼈나 잇몸이 채워버린 것뿐입니다.

단, 이건 꼭 구분해야 합니다. 이빨 윗부분이 사라진 모습만 보면 똑같아 보여도, 원인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몸이 스스로 녹여낸 것인지, 아니면 딱딱한 걸 씹다가 부러진 것인지 구별해야 치료 방향이 정해집니다.
파절 원인과 자가 검진 방법은 👉 강아지 이빨 부러졌을 때 알아야 할 5가지 — 소형견 파절 원인부터 자가 검진까지 에서 감별해보세요.
6. 어느 이빨에 잘 생기나 — 아래턱 큰어금니가 1순위
강아지 TR은 아무 이빨에나 생기지 않습니다.

1순위: 아래턱 큰어금니 — 씹는 힘이 가장 크게 실리는 곳
2순위: 아래턱 작은어금니 (송곳니 뒤쪽 이빨들)
드물지만 심각한 경우: 위턱 송곳니
송곳니는 발병 빈도는 낮지만 생기면 임상적으로 가장 심각합니다.
위턱 송곳니는 뿌리 끝이 코 안쪽 공간과 아주 가까워서 위험 부위입니다. 이 부위가 손상되면 입천장과 코 사이에 구멍이 생기는 구비강 누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원인이 TR이든 치근단 농양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이 합병증의 실제 사례와 진행 과정은 👉 강아지 치근단 농양 원인·증상·치료 완벽 가이드 에서 아파트 14층 코코 이야기로 자세히 다뤘습니다.

그리고 여기 함정이 있습니다. 아래턱 큰어금니는 집에서 육안으로 발견하기 가장 어려운 위치입니다. 앞니나 송곳니는 아이가 하품하거나 놀 때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아래턱 뒤쪽 큰어금니는 입을 벌린 뒤 볼을 뒤로 젖혀야 겨우 보입니다. 대부분의 보호자님은 살면서 그 부위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실 겁니다.
집에서 발견하기 가장 어려운 위치에, 가장 흔히 생기는 병. 이게 강아지 TR의 함정입니다.
7. 진단은 무조건 X-ray

프롤로그의 그 원장님이 하신 말씀에 원칙이 다 담겨 있습니다. “X-ray로 확인해봅시다.”
경험 많은 원장님도 육안으로는 강한 의심, 확진은 반드시 X-ray 통해 하십니다. 미국동물병원협회(AAHA)의 2019 치과 진료 가이드라인은 스케일링을 위해 이미 마취를 했다면 그 상태에서 입안 위아래 이빨을 하나도 빠짐없이 X-ray로 촬영하는 것을 표준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스케일링만 하고 X-ray는 안 찍는 병원이 아직 많다는 점입니다. 보호자가 먼저 요청하셔야 합니다. “스케일링할 때 치과 X-ray도 함께 부탁드립니다”라고요. 특히 8살 이상, 앞의 신호가 하나라도 보이는 경우엔 필수입니다.
8. 치료 — 유형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AVDC는 TR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유형에 따라 치료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 Type 1 (염증성): 뿌리가 아직 살아있음 → 완전 발치
- Type 2 (대체성): 뿌리가 뼈로 대체됨, 강아지에서 가장 흔한 형태 → 크라운 절제술 (머리 부분만 잘라내고 뿌리는 남김)
- Type 3 (혼합형): 부위별로 다르게 접근
헬스경향의 반려동물 건강 이야기(국내 매체의 치관절단술 소개)에서도 “뿌리가 모두 흡수됐다면 치관만 발치하는 치관절단술을 실시하고, 뿌리가 있다면 남김없이 발치한다”고 명시합니다.
모든 이빨을 다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셨다면, X-ray 소견을 근거로 유형별 치료를 하는지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에필로그 — 그 황구는 지금

그날 이후 그 황구가 어떻게 됐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모쪼록 잘 치료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아이의 오늘, 혹시 그 황구와 같지 않은지 한 번쯤 입을 들여다봐 주세요. 그리고 다음 스케일링 예약 때는 꼭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이번엔 치과 X-ray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강아지 구강 질환의 시작점, 자가 진단 가이드는 👉 강아지 치주염 4단계 자가 진단, 소형견 5배 취약 정말일까?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 콘텐츠는 반려동물 건강 정보 제공 목적이며, 실제 진단·치료는 반드시 반려동물 치과 전문 수의사와 상담하시길 권합니다.
📚 참고 자료
국제 자료
- Peralta et al. 2010 (PubMed) — 코넬 대학교 수의대의 강아지 224마리 전 구강 X-ray 분석 원전 논문 (강아지 TR 유병률 53.6%·무증상 86% 근거)
- VCA Hospitals — Tooth Resorption in Dogs — 미국 최대 동물병원 체인 VCA(Veterinary Centers of America)의 강아지 치아흡수병변 공식 진단·치료 가이드
- AAHA 2019 Dental Care Guidelines — 미국동물병원협회의 개·고양이 치과 진료 국제 표준 (마취 하 전악 X-ray 권고)
국내 자료
- 파블로원장 — 강아지 치아흡수병변(CORL) 임상 소견 — 서울대 부속동물병원 진료수의사의 강아지 CORL 국내 진료 경험 정리
- 헬스경향 — 이빨 녹는 치아흡수성병변 — 국내 반려동물 건강 매체의 치관절단술 및 발치 기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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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보: 다국적회사 제약 영업 14년 + 동물의약품 유통 총괄 10년 경력자(전 사노피, 에스틴 근무)가 전하는 더 많은 이야기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펫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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